서울데카당스live
서울데카당스 Live.
"앞으로의 사람들은 무엇에 희망을 걸고, 어떻게 환멸감을 이겨내면서 나아갈까"
옥인콜렉티브가 구일만햄릿을 연출했던 진동젤리와 배우이자 노동자 두명을 섭외하여 진행한 퍼포먼스이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여러가지로 글을 써보았는데, 막상은 귀찮기도 하고 구구절절이 비평적 언어로 남겨두는 것도 그리 내키지 않아 나를 위해 인상깊었던 것 만 몇개 적어두려한다.
- 장소성
장소는 인디아트홀 공 (처음 가보았다) 인데, 폐 공장을 꾸민 공간이었고 퍼포먼스는 옥상에서 이루어졌다. 벽 한쪽을 허문 듯한 옥상은 꽤 탁 트인 전경을 가지고있었다. 주변이 작은 공장지대라 그런지 고층 건물도 없었고, 공장 옆에 길다랗게 솟아있는 굴뚝이 꽤나 운치있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길에는 캐캐한 분진 냄새같은 것이 났다. (마스크를 줬지만 급히 가느라 착용하지 않았다) 이야기는 공장의 장소성에서 출발한다. 사운드로, 노동자와 누군가의 대화가 나오는데, 그들이 일했던 공장에 대해 말한다. 창문이 있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거기서 어떤 작업을 했는지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공장' 이라는 것은 추상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재 냄새 맡고 현재 보게 되는 낡고 묵직한, 강한 물성을 가진 공장의 물리적 형태와 조응한다.
- 무대가 만들어지는 방식.
왜인지 앞에 나와있던 의자를 객석으로 치워 둔뒤, 하얀 석회가루로 사각형을 만든다. 이것은 무대가 된다. 그림을 작품이게 하는것은 흰색 벽이다. 무대를 만드는 방식, 작품을 작품이게 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를 느꼈다.
- 연기지도
구일만 햄릿을 볼때도 느낀것인데, 노동자들과 연극을 한다. 는 과정에서 일종의 문화적 선진부위가 그렇지 않은 노동자들을 '가르치는' 관계가 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미심쩍음이 있었다. 구일만 햄릿에서도 영상으로 연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나오는데, 오늘은 그 과정이 퍼포먼스의 중심이었다.
햄릿은 지금 없다고 한다. 극중에선 '휴가'라고 표현했는데 긴 투쟁에 지쳐 잠시 떠난 것일테다. (나중에 다시)
때문에 폴로니어스 왕과 오필리어가 주인공이다. 폴로니어스부분에서는 작품에 대한 그의 해석을 대해 묻는다. 첫번째로 나오는 독백인데, 이 대사를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관객들과 어떻게 관계맺어야 할지, 그리고 본인 삶에서 이 연극이 어떤 의미였는지. 오필리어에게서는 햄릿의 감정을 이끌어낸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은 고뇌하고 방황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청순하고 순진한 오필리어는 정치를 하는 어른들에게 이끌려나와 햄릿에게 말한다. 선물을 돌려주겠다고. 여기에서 연출자는 햄릿이 오필리어를 바라볼때의 그 기가막힌 심정을 오랜 투쟁을 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들의 심정에서 이끌어낸다.
기억을 위해 이걸 자세히 써놓을까했는데, 이건 말로 담을 수 있는게 아닌것같다.
왜 하필 햄릿이었는지를 이해하게 되는 대목이었다. 앞서 폴로니어스 왕의 부분에서 연출자는 배우에게 연극은 관계다 라고 말한다. 그 말 또한 이해하게 됐다. 구일만햄릿이 연극적 상황과 그 이면 모두를 잡아내려고 했다면 서울데카당스는 연극적 상황 밑에서, 그들의 삶을 연극의 무대로 이끌어나온다.
"2011년 1월 6일 오전 6시, 김진숙은 영도조선소 높이 35미터 85호 크레인으로 올라갔다. 309일이 지나고 그녀가 크레인에서 내려온지 벌써 두 달, 그녀의 말과 몸은 미디어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퍼포먼스 예술가로 주장하면서 새롭게 지속시키고 싶다. 퍼포먼스는 한시적인 예술이지만 반복을 거부하고 일상을 갱신하기 때문이다. 비약으로만 읽힌다 해도 어떤 열망이 맞닿아 있는 나의 미학관점은 블랙박스와 화이트큐브를 벗어난 맥락에서 이루어진 김진숙의 고공농성을 예술로 호명하고자 한다. 그렇다. 그녀가 펼친 309일간의 저항은 가장 길고도 시적이었던 퍼포먼스였으니까"
임민욱의 글이 떠올랐다.
구일만햄릿 때와는 또 다른 정서를 느꼈다. 햄릿의 부재에서 알 수 있듯. 2심에서 패소하고, 지금 여러가지로 좋은 정세라고 보기 힘든 때다. 오랜 투쟁에 지쳤을테다. 함께 해왔던 사람들도 그 무력함을 이겨내기가 힘들테다. 이들은 어떻게 나아가게될 것인가..
옥인콜렉티브의 시도, 앞서 진동젤리의 시도는 노동자들의 삶을 '예술'이라는 영역으로 끌고 들어온다. 그것은 단순히 이들이 '연극'이라는 예술의 형태를 취해서는 아닐테다. 이들의 삶의 하나의 결을 언어화하고 시각화하는 방식에 관심이 많이 간다.
처음에 대사를 읊을떄는 하나의 대사였다. 그런데 그 단어에 숨긴 의미가 무엇인지 이들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하나하나 반영해나가고있다는걸 알았을때, 다시 듣는 대사는 다르게 들렸다. 무엇이든 일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극히 피상적인 것들 뿐이다. 이들과 관계할때, 현상은 매우 새로운 의미를 갖게된다.